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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울 시내에 정체불명의 커다한 검은 구가 나타납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사람보다 조금 빠르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구는 오직 살아있는 사람만을 흡수합니다. 신체가 닿기만 하면 그대로 흡수…….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검은 구는 모든 물리적인 공격에 끄떡없고 물리법칙을 무시하듯 지면을 떠다니며, 공중에 솟아오르기도 하고, 벽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검은 구가 주는 압도적인 공포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현실세계의 법칙을 가볍게 무시하며 주인공을 계속 도망치게 하는 검은 구는 정말 무서운 존재입니다만, 더욱 무서운 건 검은 구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혼란 속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인간들을 치밀하게 묘사한 부분들은 정말 현실적으로 다가와 소름이 끼치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선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들 정도로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어쩌면 혼란이 가라앉은 후에 사람들은 검은 구를 검은 구나 공포의 구가 아닌, 절망의 구로 부른 건 아마도 구에 흡수된 사람들이 이후의 상황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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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 수집가 - 8점
오타 다다시 지음, 김해용 옮김/레드박스
기담을 구합니다!
직접 겪은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에게
상당액의 보수를 드립니다.
다만 심사를 통과할 경우에 해당합니다.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기묘한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러 갑니다.
Strawberry Hill라는 술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기담 수집가 에비스 하지메와 그의 조수 히사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에비스 하지메와 히사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에게 짤린 남자의 이야기.
거울 속에 사는 소녀에 반한 남자의 이야기.
초능력을 가진 마술사를 만난 여자의 이야기. 등등
총 6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기담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를 보는 기분이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에비스의 조수 히사카가 그건 기담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의 사건이다! 라고 명쾌하지만 다소 심심하게 기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사실 히사카가 활약하고 나면, 기묘한 이야기보다는 '순간포착 세상의 이런 일이'에 가까운 건조한 이야기들입니다. 호시 신이치 쇼트쇼트 콘테스트 수상자답게 호시 신이치의 담담한 문체에 영향을 받은 서술 방식도 한 몫 합니다. 카피문구인 '오싹하고 뭉클한 서프라이즈 기담'이 무색해지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7번째 이야기에 있습니다.

7번째 이야기에서 앞서 등장한 6편의 이야기들이 엮어지는 기발한 구성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사실 잡지 연재 시에는 없었고, 단행본에만 수록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수록되면서 작가가 화룡정점을 찍었다고 생각됩니다.

[추천] 장르소설에 익숙하지 않지만 새로 도전하고 싶은 독자. 장르소설
[비추] 오싹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
"소개팅 나와라. 좋은 여자 한 명 소개해 줄게. 나랑 같은 부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인데, 예전에 한 번 너랑 나랑 찍은 사진 보고 관심이 좀 생겼던 모양이더라. 예쁘기도 되게 예쁘고. 솔직히 너 같은 놈한테는 아까운 여자지만, 내가 특별히 양보한다! 실연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풀어야지?"

불쑥 전화를 건 친구가 뜬금없이 꺼낸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쩐지 요 며칠간 집에 와서 영양가 많은 음식을 먹이려 한다 싶더니, 소개팅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잘 먹은 덕분에 볼품없을 정도로 야위지는 않았지만, 저의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나는 줄곧 의문을 품어왔었다. 그런데, 배후에 숨겨둔 목적이 설마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그러나 사실 내가 더욱 당황한 이유는, 역시 11시 11분의 전화 때문이었다. 누군가 새로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는 또 그 전화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게다가 나는 전화의 주인공에게 이미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 말솜씨가 서툴고 어수룩한 나는, 다시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예전 여자친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가 홀로 지낸 지는 거의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겨울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이젠 나도 사람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자, 녀석은 답답했던지 또 곧장 달려와서 반강제로 나를 씻기고 면도를 시켰으며 머리를 다듬고 옷까지 사 주었다. 그러고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친구는 나에게 다음 날 약속에 응할 것을 거듭 요구하며 마지못해 돌아갔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내 성격을, 녀석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전화는 걸려 왔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저… 내일, 소개팅 나갑니다. 그동안 제 얘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통화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어떤 분이신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그리워질지도 모르겠구요. 그렇지만 용서는 하지 않을 겁니다."

두 세계의 경계와도 같았던 그녀의 비웃음 소리가 들릴 새도 없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것도 하나의 이별이라는 생각에, 나조차도 놀랄 만큼 슬펐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방금 온 걸요."

오랜만의 외출은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보이게 했지만, 어째서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만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큰 눈, 제법 높은 편인 코, 다부진 입술에 날카로운 얼굴선을 가진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예쁘지만 왠지 얄미운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얼굴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조금 못 생겼더라도 정감이 가는 얼굴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우선 얄미운 인상과는 달리 차분하고 어딘가 친근한 목소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와 그녀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났음에도 마치 나의 일부라도 되는 양 나를 속속들이 꿰뚫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냄에 따라, 나는 그녀에 대해 점차 호감을 품게 됐다.

하긴 애초부터 나는 외모보다는 성격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몇 달이나 사람의 온기에 굶주려 있던 나였다. 처음 만난 여자에 대한 호감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풀어갔다. 하지만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어느덧 밤 11시가 넘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한 그녀와 나는, 헤어지기 전에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기로 했다. 여자에게 먼저 전화를 시키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내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번호 찍어 주세요. 제가 전화할게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번호를 찍더니,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말했다.

"저는 여기서 지하철 타면 되거든요. 제가 안 보이게 되면 전화 거세요. 또 만나요!"

나는 그녀에게 택시를 타라고 권유했으나, 그녀는 지하철이 더 편하다며 한사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이윽고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계단을 울리는 발랄한 하이힐 소리가 지상에 있는 나에게까지 들렸다. 나는 그 순진함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스토커.

한 순간, 심장이 멎었다. 제발 아니길, 착각이길 바라며 떨리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11분.

"여보세요?"
"…."

익숙한 침묵. 다리가 떨리다 못해 힘이 빠져서 풀리려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훗, 후훗, 하하. 하하하하!!"

계단을 도로 올라오는 구두 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 메아리는 더 이상 발랄하지 않았다. 점차 가까이 다가온 발소리는, 내 등 바로 뒤에서 인기척으로 변했다. 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전화를 받은 채, 내 바로 뒤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웃었다. 언젠가 들었던,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수화기와 등 뒤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많이 그리웠어?"

본 소설은 향수님께서 잠밤기에 올려진 괴담을 소재로 쓰신 것입니다.
향수님의 허락 하에 잠밤기에 연재합니다.

그 후의 기억은 마치 잘라낸 듯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한참 후에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건 내 방 천장의 익숙한 무늬였는데, 원래 하얀 색이었던 벽지가 어째서인지 노랗게 보였다. 깨어난 직후에는 너무 몽롱해서 때가 탔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하늘이 노랗다'는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여자친구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술을 어지간히도 마셨던 모양이다. 후에 알아보니 그 날 내가 불러낸 녀석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아마 술집 하나가 문을 닫을 때마다 친구 한 녀석과 헤어지고 다른 술집에 들어가면 또 다른 녀석을 만나기를 반복했나 보다.

희미했던 정신이 점차 뚜렷해짐과 동시에 나는 강렬한 자극을 느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역한 냄새였다. 지난 밤, 방 안 아무데나 토해 놓은 덕에 악취가 진동했다. 그 다음으로는 심각한 위통이 느껴졌다. 듣자하니 나는 소주건 맥주건 양주건 간에,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술만 주구장창 마셨던 모양이다. 이러니 속이 쓰린 게 당연했다. 이윽고,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쑤셔왔다.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데도,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다녔을 내 모습이 눈앞에 훤히 펼쳐졌다.

'일단, 일어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힘을 준 순간, 잠시 바닥과 멀어지나 했더니 오히려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간밤의 과음과 구토 때문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토록 무기력한 나 자신을 발견하자,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한 번 눈물이 나기 시작하자, 이윽고 그것은 오열로 변했다. 한심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서,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펑펑 울었다. 뺨에 말라붙어 있던 토사물이 눈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울다가 기력이 소진해 버린 나는,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통화목록의 아무 번호로나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건 8년이나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지내온 죽마고우였다. 나는 지금 당장 내 집으로 와 달라는 한 마디만을 겨우 남기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그 이후 몇 달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하나 뿐인 아들을 걱정하셨던 부모님도, 내 사연을 안타깝게 여겼던 친구들도, 잇단 결근에 걱정이 되어 문병을 온 직장 동료들도 정작 내가 살고 있는 꼴을 보면 질색을 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는, 이제 담즙 섞인 토사물의 악취를 지우기 위해 뿌린 방향제 냄새가 더 지독했다. 바닥에는 육안으로도 그 두께가 확인될 만큼의 먼지가 쌓여 있었고, 내가 하루 종일 누워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침대 옆에는 인스턴트식품의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지못해 세수나 양치 정도는 했지만, 몇 달간 목욕은커녕 샤워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서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이 삐죽삐죽 흉하게 자랐고, 며칠 가다 내키면 감는 머리는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밤낮이 바뀐 탓에 햇빛이라고는 본 적도 없어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열악한 영양 상태로 인해 볼은 쑥 꺼지고 몸은 야위었다. 그래도 잠은 많이 자서 기미는 생기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폐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내게 질려 버린 부모님조차 찾지 않는 내 오피스텔에 한 친구 녀석이 계속 와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술이 떡이 돼서 돌아온 날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와 준 바로 그 녀석이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벌써 회사에서 연달아 승진하고 있는 녀석이라 많이 바쁠 테였지만, 그래도 친구로 지내온 시간이 있어서인지 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찾아와서 도와주었다. 참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게 닥친 심리적 타격이 너무 커서인지 당시에는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스토커의 전화는 변함없이 걸려오고 있었다. 친구의 간호 덕에 기력을 되찾은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보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미 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쪽을 생각해서 바꾸지 않았는데, 정작 자기는 그렇게 쉽게 바꿔 버리다니….'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혼자서 곱씹고 있을 때, 다시 스토커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계를 보니, 역시 11시 11분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흑, 흑흑."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익숙한 소리. 한동안 침묵 속에서 들리지 않았던 그 울음.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악마의 말을 속삭였던 가증스러운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망가졌어!! 네가 전화만 안 했어도, 그 따위 거짓말만 안 했어도 헤어질 일은 없었단 말이야!!"

그 후로 몇 분이나 나 혼자서 지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침 튀겨가며 욕을 하던 나는 문득 수화기 너머의 울음소리가 멎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인사불성이 된 나에게, 그 사실은 공포 대신 더 큰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나를 무시하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증오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뭔데? 당장 대답해! 왜 무시하는데!!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거 아냐, 아니면 끊어!!"
"…훗."

웃음소리와 비슷한,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가 들은 것이 정말로 웃음소리였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멍하니 앉아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나에게 오는 전화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물꼬를 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고, 사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여자에게는 얼마든지 원망하고, 질책하고, 한탄하고 욕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한심한 나 자신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11시 11분의 전화를 거는 여자에게만은 더없이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정도가 심해져서 내가 완전히 자신을 잊고 오만해질 즈음이면,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비웃음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의 종막을 알리는 새벽의 알람과도 같았다.

매일 11시 11분부터 새벽이 밝을 때까지, 이제는 내가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말을 쏟아냈다. 여자는 이제 울지도 않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처음 며칠간은 무작정 화만 냈지만, 할 말은 금방 없어졌다. 목적도 계기도 잃은 행위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짓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스토커 또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지극히 드문 하나의 인격이었다.

결국 나는 점차 그녀에게 나의 추억이나 과거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즐겁기까지 했다. 아주 오랫동안 전화를 하는 동안에, 평생의 원수는 어느 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간쓰레기가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을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밤부터 새벽까지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해가 뜨면, 그녀의 미묘한 비웃음 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세계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계속...)
모방범, 이유, 화차 등 사회파 추리소설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집입니다.
(잡지 괴(怪)에 연재한 단편들을 모은 것.)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시대물(외딴 집, 혼자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도 괴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다른 작품과 달리 괴이는 본격적으로 원한이 사무치고 저주를 내리는 전형적인 괴담 형식의 괴이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로 이야기들은 망령이나 저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다루는데, 이런 존재에 대한 묘사도 섬뜩하고 무섭거니와, 이런 존재를 탄생하게 된 원인이 사람에 관련된 것이라 더더욱 오싹하게 느껴집니다. 가령 남편의 불륜에 상처받은 아내의 원한이라든지 말입니다.

9편의 이야기 모두 무섭지만, 특히 추천하는 이야기는 '아다치 가의 도깨비'와 '이불방'입니다.

작품 속의 등장하는 망령도 무섭지만,
정말 무서운 망령은 무엇인지.
그러한 망령을 만드는 건 누구인지.
혹시 내 안에 있는 건 아닌지.
작품을 읽고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드는 괴이.

늦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에 읽기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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